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족대표 33인 (문단 편집) === 33인 중 [[친일반민족행위자]]가 된 인물 === * 박희도 33인 중 최연소. 3.1 운동 후 잡지 『생활사』 창간.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 스타가 되었으며[* 여제자와 '''키스 내기 [[화투]]'''를 했다는 것이 알려져 엄청 시끄러웠다. 이를 처음 보도한 신문은 [[조선중앙일보]]였다. 이 사건으로 박희도가 여자와 곱사춤을 잘 추는 명인이라고 소개되는 [[합성]] 드립까지 나왔다. 사진은 한용운 항목에서 볼 수 있다.] 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 잡지 『동(양지)광』의 창립인, 주간으로 있으면서 [[친일반민족행위자]]가 되었다. 1948년 [[반민특위]]에 회부되었다가 1951년 사망. * [[최린]] [[천도교]]. 선언문 초안 작성. 1934년 중추원 참의,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[[매일신보]] 사장, 39년 임전 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.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으며, 이때 옆에서 "민족을 위해 친일하였다"고 진술하는 [[이광수(소설가)|이광수]]에게 닥치라고 했다. [[6.25 전쟁]] 때 납북되었다. * [[정춘수]] 3.1 운동 당시 [[감리회]]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지도했다. 1934년 흥업 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연행되었다가 전향서를 쓰고 풀려났다. 신사 참배 및 [[창씨개명]], 그리고 '전도보국', '내선일체'를 부르짖으며 신도들에게 자원병 가담을 호소하고 교회 예배당을 헐어서 일본군 비행기 제작에 동원하는 등의 친일 행위로 인해 [[친일반민족행위자]]로 간주되었다. 이로 인해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되었으며 1951년에 사망했다. [[청주시]]의 우암산에 조성된 삼일 공원에도 이 사람을 포함한 [[충청북도]] 출신의 민족 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에 시민들이 철거해서 지금은 5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